제목 이름 비밀번호 내용 “어이 별 일 없나?” 오랜만에 친구 K가 전화를 걸어왔다. “음, 덕택에. 니는?” “나도 그렇지 뭐.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도 또 오늘처럼 그렇겠지.” “그게 좋은 거다. 천국이 별건 줄 아냐?”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하루는 천국의 하루와 같다고 했다. 일상에서의 비범을 고대하고 살지만 한편으로는 무사여일이 얼마나 소중한 지 느닷없는 큰일을 당하고 보면 그걸 실감하게 된다. 행운의 전화가 온다거나, 뜻밖의 보너스를 받는다든지, 팔자 고칠 복권 당첨… 이런 비범에는 호사다마, 버디 값처럼 차후에 꼭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갑자기 걸려오는 친지의 사고 소식, 내 잘못으로 인한 비난, 또 떨어진 아파트 추첨, 중간고사 망쳤다며 울먹이는 늦둥이 아들…… 이렇게 속 상하는 일에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렇구나, 그나저나 영근이 알지?” “음, 옛날 고향 동네의 보탕아제 아들?” “그래, 글마가 공 한번 치자는데 올 수 있나?” “글마, 지금 어디서 뭐 하는데?” “조폭 아이가. 수영 쪽에서 유명한 퇴폐 이발소를 한다네.” “언젠가 조폭하고 골프 치다가 판사들이 줄줄이 옷 벗던데?” “우린 판사 아니잖아.” “그래도 그러네. 생각 좀 해보고.” “내일 모레까진 연락 주라.” “알았다.” 그런 전화를 받고 보니 당연히 내 생각은 과거로 회귀한다. 나이가 들면 옛날 이야기만 자꾸 한다는 게 일본 속담이던가……. 영근이는 고향의 한 해 후배이다. 영근이의 부모가 위의 제목에서 말한 보탕 아제와 버지기 아지매이다. 보탕은 도끼질할 때 밑에 가로로 받침하는 제법 둥치가 굵은 통나무를 이르고 버지기란 맷돌보다 원구가 큰 그리고 속이 제법 깊은 옹기를 말한다. 시골 동네 어디랄 것 없이 세 부류의 특이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첫 번째가 씨 감자 캐다가 짚 볏가리에 불질러 구워먹는, 삼룡이 내지는 용팔이로 불리는 밥 많이 먹고 연장 튼실한 사람이다. 그의 특징은 명이 좀 짧아 여름 저수지나 겨울의 논둑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다행히 명이 길다손 쳐도 엄지 머리로 늙어간다. 두 번째는 식전 댓 바람부터 이 집 가서 ‘저 집 양반, 어제 이불 등허리에 덮었다’ 더라 하는 식으로 온 동네에 말 물어 나르는 촉새 할멈이다. 세 번째는 동네 애들 킬러로 군림하는 욕쟁이 내지는 호랑이 할매이다. 이 할매들의 공통점은 유달리 장수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세 번째 할매인 욕쟁이 할매와 연관된 이야기다. 이 할매의 택호는 갱나미 댁으로 우린 ‘갱나미 할매’라고 불렀다. 그날도 배꼽 마당에서 오백이 아재 대밭 바람소리 들으며 깡통 차며 놀았다. 가시나 머슴애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그 시절 놀이였다. 그런 우리들 앞에 호랭이 갱나미 할매가 어느새 떡 하니 와서는, “인자 궁디 커가는 년들이 무신 쪼차바리를 한다꼬 용대 발광이고……. 고알 널찌모 시집은 우찌 갈라 카노...” 하면서 고래 고래 고함을 친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좀팽이들은 눈만 멀뚱멀뚱 하며, “야, 고알이 머꼬?” “몰라.” “니는 아나?” “내도 모르것다.” “그라모 우리 상호네 아래 채에 사는 선샘한테 가서 함 물어볼까………” 그러다가 어른한테 뭘 물어본다는 것이 지금처럼 쉽지 않을 때인지라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식으로 유야무야 되었다. 축담에 앉아서 우리 할매가 내게 엄명한 숙제, 두부 만들 콩에 섞인 돌을 친구와 함께 가리고 있는데 갱나미 할매가 삽짝 문에 들어섰다. “갱나미 할매 오싰는교?” “오냐. 너그 핼미 어디 갔노?” “할매 아까 참에 서답하러 갔심니더.” “그라모 너그 핼미 오모 내 왔다 갔다 캐라......” “야......갱나미 할매. 안녕히 가시이소…” 딱 요기 까지만 했어야 되는 건데, 입 벌려 매 번 소리가 나왔다. “저 갱나미 할매요......아까 말한 그 고알이 뭔교?” 그러자 갱나미 할매는 느닷없이 축담 옆에 있던 빗자루를 꺼꾸로 들더니 니 새끼 죽나 내 새끼 죽나 함 보자 식으로 패대면서, “요 우라질 눔에 소상머리야…또 그랄래?.....또 그랄라나?..” 하길래, “언지요 언지요. 갱나미 할매요. 다시는 안 그랄게요...” 하며 싹싹 빌었다. 그 다음부터는 멀리서 갱나미 할매 그림자만 봐도 돌아서 다녔다. 그 해 추석 무렵, 갱나미 할매 먼 일가붙이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영근이란 이름의 우리 또래 좀팽이를 앞세우고 두 내외가 왔다. 어디서 무엇 하던 사람들인지 알 길은 없고, 단지 영근이 엄마는 그 때의 여자로서는 드물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참으로 뚱뚱했었다. 영근 아버지 어머니가 ‘보탕아제’와 ‘버지기아지매’가 된 사연인즉 이러하다. 이사온 다음 날인가 영근이네 부모님이 부부가 싸움을 한판 거하게 했다는데, 촉새할매의 입을 빌어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하이고 얄궂어래이. 세상천지에……동네 사람들아 함 들어보소. 무신 여자가 그런 여자가 다 있는교. 남정네가 귀퉁배기 한대 올리니까 거 안경 씬 뚱뚱한 여자가 하는 말이, ‘니가 보탕 가튼 X을 찼시모 내는 버지기 가튼 O을 찼다. 내가 아들을 몬나 존나 딸을 몬나 존나……와 때리노!!’ 카면서 정지 칼을 들고 쪼차 나와가 지 서방 앞에 대고는 쥑이라 쥑이라 니가 몬쥑이모 내가 쥑인다 그래 해대대요……. 하이고 무시라..” 여기까지가 촉새할매의 말이고 보면 진짜 정지 칼을 가지고 나와서 그랬는지는 의문이 남지만 보탕X 하고 버지기O은 가감 없고 틀림없는 이야기다. 왜냐면 그 후도 싸움은 계속되었고 싸움 구경을 가서 몇 번이나 들었다. 그래서 영근네 부모는 택호도 알리기 전에 우리 좀팽이들한테는 자연히 보탕 아제, 버지기 아지매로 통하게 되었다. 가을걷이 지나 겨울까지 두 내외는 동네 농사를 돕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탕아제는 일 없으면 거의 두문불출이고 버지기 아지매만 가끔 구판장에서 막걸리깨나 축내고 절구통 만한 몸 뒤뚱대며 고샅 길로 걸어가곤 했다. 두 내외의 부부싸움은 한 달에 한 두 번은 족히 해댔는데, 그런 날은 어김없이 버지기 아지매가 구판장의 동네 남정네들 막걸리 판에서 ‘홍도야 우지 마라’ 정도를 불러 제낀 날이다. 그 부부싸움은 싸움의 발단과 과정이나 마무리가 똑 같아 신기할 지경이었다. 버지기 아지매가 홍도야~ 소리를 한 날, 보탕 아제는 이런 화냥년 하면서 귀싸대기 한대 올려 붙이는데, 다음은 버지기 아지매 차례이다. 예의 그 ‘니가 보탕X이모 내는 버지기O이다’를 시작해서 ‘밥 달라면 밥 주고 뭐 달라면 뭐 줬는데 와 때리노......’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누군가 재빨리 갱나미할매한테 통기를 넣었는지 삽짝 저만치 갱나미 할매 그림자만 보이면 가만 당하고 있던 보탕 아제는 마당에 대짜로 누워서 기나긴 사설을 읊었다. 그런데 이게 또 한 글자 안 틀리고 그 상황에 딱 그렇게만 한다. "아이고 갱나미 아지매. 내가 이래가 우찌 사는교……저 시빠질 년이 서방 눈 까리 시퍼렇게 살아있는데……저 화적 보따리 털어 묵을 년이……서방질을 하고 댕기고... 아이고 아지매...갱나미 아지매...저 조선 망구코 대국 망굴 년이… 아이고 갱나미 아지매 인자 저승 가서나 보입시더…소 이까리 좀 끌러다 주소… 내 저 메구 겉은 년 보는 데서 모가지를 메고 칵 죽어삘랍니더...... 아이고 아지매요...머하는교...썩은 새끼.동가리라도 좀 찾아보소...” 여기까지 하고는 목에 침이 마르는지 어쩐지 철버덕 퍼질라 앉아서는 황소 울음 울 듯 움머 움머 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또 신기한 거는 이렇게 한 사설 다 듣도록 욕쟁이 갱나미 할매가 욕 한마디 안하고, “바라 바라 이사람, 영근 애비야...니가 그카모 되나…남이 그캐도 아이라 캐야지… 세상천지 하늘 똥구녕 밑에 눈구녕이 배꼽 밑에 달린 놈이라도 우찌 저 절구통 겉은 걸 여자로 보겠노. 어야..그카는 거 아이다...어여 정신 채리라... 야야…영근아, 니는 뭐하노 찬물 한 그릇 퍼뜩 안 떠오고......” 더 신기한 것은 절구통 같은 버지기 아지매는 마당 가에 절구통같이 미동 없이 고개만 외로 돌리고 앉았다가 찬물 소리에 벌떡 일어나 한 바가지 떠다가 보탕아제에게 건네주는 걸로 싸움은 끝난다. 나중에 촉새할멈의 이야기로는 보탕아제는 갱나미 할매 사윈데 딸이 죽고 나서도 소식하고 살다가 일가붙이라 하고 동네로 불렀다는 소문이 한 바퀴 돌았다. 버지기 아지매의 딸 영근이 누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갔다는데 수녀는 못되고 엉뚱한 신이 내려 무당이 되었다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세월이 흘러도 다들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 부모가 그런 왁자한 부부싸움을 벌이는 날, 영근이는 집 모퉁이 담벼락에 기대 앉아 땅 바닥에 뭔지 알 수 없는 그림만 잔뜩 그리고 있었다. 교육학적 소견으로는 부부싸움이 잦은 집의 아이들은 비행 청소년이 되어도 성적인 탈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영근이가 부산에서도 소문난 지역의 퇴폐 이용업소를 한다는 이야기가 난데 없다거나 새삼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조폭들은 야쿠쟈처럼 기업화되어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한다. 당연히 골프도 칠 것이고 남이 하는 것은 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영근이와 함께 골프를 친다는 것은 켕기는 일이다. 혹시 그린에서 롱 퍼팅이라도 하나 들어가면 이런 멘트를 날리지 않을까. “오늘 따라 공이 쏙쏙 들어가는 게……홀 컵이 버지기만 하게 보이네!” 첨부파일1 첨부파일2 첨부파일3 첨부파일4 첨부파일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