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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이야기(2) 펀글
04-20 11:07
제물론(齊物論) – 나와 너는 다르지 않고 삶과 죽음 또한 그러하다.



2-1 남산주성이 평상에 기대앉아 하늘을 올려보고 긴 한숨을 내 쉬었다. 멍한 모습이 흡사 정신 나간 사람 같았는데 옆에 있던 하울이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몸은 고목 같고 마음은 죽은 재와 같아 보입니다. 지금 평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제의 그 사람입니까?”



주성이 말하길, “울아 제대로 보았구나. 네가 본 것처럼 오늘 나(吾)는 나(我)를 잃어버렸다. 너는 사람이 내는 소리는 들어보았겠지만 땅이 내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혹 네가 그것을 들어봤다 해도 하늘이 내는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울이 말하길, “제가 그것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주성이 말하길, “무릇 땅이 뿜어내는 기운을 바람(風)이라 하는데 평상시는 불지 않으나 한번 불면 만개나 되는 구멍에서 화가 난 것처럼 소리를 뿜어낸다. 너는 ‘요요요요’ 하는 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숲이 심하게 흔들리며 큰 나무 구멍에서 마치 코, 입, 귀, 됫박과 그릇과 절구에서처럼, 혹은 깊은 웅덩이나 좁은 웅덩이처럼, 제각기 생긴 대로 격류가 흐르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가늘게 숨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 먼 곳에서 나는듯한 소리, 새가 우는듯한 소리, 등 온갖 소리가 난다.



앞에서 ‘우우’하고 울면 뒤에서 ‘웅웅’하는 소리가 나고 산바람이 가볍게 불면, 거친 바람이 무겁게 화답한다. 그러다 바람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다시 고요해지는데 너도 저 나무들이 휘어지고 구부러지며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울이 말하길, “땅이 내는 소리는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고 사람이 내는 소리는 대나무 피리에서 나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하늘이 내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주성이 말하길, “만물에 서로 다른 바람을 불어넣어 각각이 자기 소리를 내게 하는데 모두들 그것이 자기 것이라 하지만 실상 그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 누구겠느냐?”



1편 ‘소요유’의 웅대하고 장엄함이 사라지고 2편 ‘제물론’에서는 우리의 마음과 말, 삶과 죽음과 같은 미시적 사항에 대한 고찰이 시작된다. 다소 어려운 주제이고 지루한 장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 사람들은 과연 우리 마음과 말,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이며, 장자 전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장이다.



앞 부분의 마음과 말, 이것과 저것에 대한 얘기는 중요하다 생각되어 원문 그대로를 옮겼고, 뒤 부분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어 중요해 보이지 않는 부분은 삭제하고 요약 정리하였다. 또한 원본에서 남산주성은 남곽자기, 하울은 안성자유이며, 지루한 글 재미 삼아 필자의 느낌으로 비슷한 필명으로 바꿔 보았다.



세상은 천지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으로 구성된다. 세상이 천지인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사람만이 말이 많다. 그러나 땅도 때로는 소리를 낸다. 그렇다면 하늘의 소리는 과연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기 소리라 하여 각자 다양하고 많은 소리를 내지만 실상 바람을 일으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하늘이다. 세상에 내 것이라, 내 소리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 것인가?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유명한 말로 전도서를 시작한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인간이 스스로라 주장하는 것, 내 것이라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원래 하늘이 내려주고 땅이 만들어 준 것이다. 이것을 내 것이라 하고 저것은 내 생각이라 주장하는 것은 본래의 주인을 알지 못한 미망(迷妄)의 소치(所致)가 아닐런지.



2-2 큰 앎(知)은 한가롭고 작은 앎은 좀스럽다. 큰 말(言)은 담담하고 작은 말은 시끄럽다. 잠잘 때는 혼(魂)과 교류하고 깨어나면 형(形)이 시작된다.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이 나고 마음은 날마다 싸움질을 한다. 우유부단하고 음흉하며 좀스러운 마음은 작은 두려움 앞에 기가 죽으나 오히려 큰 두려움 앞에서는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시비를 가릴 때는 화살처럼 빠르고 이기겠다는 마음은 하늘에 한 맹세 지키듯 한다. 나날이 쇠해 가는 모습은 마치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듯하니 한번 약해진 마음은 다시 되돌려 회복하기 힘들다. 상자에 갇힌듯한 마음은 나이 들어 고집부리는 모습이고 죽음에 가까워진 마음은 다시 일으켜 소생하기 힘들다.



희로애락,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함, 터놓음과 꾸밈, 이것들은 모두 빈 데서 나오는 노래고 습한 데서 나오는 버섯이다. 마음은 이처럼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으며 찾을 길도 없구나.



이렇게 조석으로 변하는 내 마음은 내가 존재하기에 나타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없으면 또한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또한 생겨나지 않으니 얻을 길이 없도다. 이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은 확실하나 작용하는 메커니즘은 알 수가 없구나.



참 모습(眞宰)은 분명히 있는데 그 흔적을 도무지 알아낼 수 없다. 그 행동은 알 것 같은데 그 형태는 볼 수가 없다. 정(情)이 있는 것은 알겠으나 형(形)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뼈마디는 백 개, 구멍은 아홉 개, 내장은 여섯 개가 있는데 그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



모든 것이 고루 중요한가, 아니면 그 중 어느 것이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인가? 서로 군신의 입장을 번갈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 속에 참 임금(眞君)이 있는 것인가? 그 실체를 알기는 힘드나 그 참 모습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일단 한 몸을 받아 태어났으면 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저절로 생명이 다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몸이 사물과 서로 거슬리며 닳아 없어지기가 달리는 말과 같이 걷잡을 수 없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평생을 수고해도 성공을 보지 못하고 그저 일에 쫓기고 지쳐 돌아가 쉴 곳도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 하리요?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지만 이것이 어찌 중요하리오. 몸도 쇠하고 마음도 쇠하니 슬프기 그지 없을 따름이다. 사람의 삶이란 본래 이처럼 허망한 것인가, 아니면 나만 그런 것인가, 사람들 중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인가?



무릇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따라 스승으로 삼는다면 스승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변화의 이치를 아는 현명한 사람뿐만 아니라 우둔한 사람들도 스승이 있게 될 것이다. 아직 확고한 자신의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월나라에 도착했다고 하듯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신화 속 우 임금도 어찌할 수 없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그 일을 알 수 있으리오.



여기서 장자는 마음에 대해 논하고 있다. 잠잘 때는 꿈속에서, 깨어있을 때는 형체를 가지고 분명하게 느껴지는 이 마음. 과연 이 마음은 어디서 생겨나고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내가 있기에 마음도 생겨나는 것인데 마음이 없다면 나도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나와 마음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마음은 단지 나의 종일 뿐인가, 아니면 나의 진짜 참 모습인가?



컴퓨터의 경우 하드웨어가 있고 그 하드웨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윈도우와 같은 운영체계가 있어야 하며 또한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글이나 엑셀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과연 하드웨어만을 컴퓨터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하드웨어, 운영체계, 소프트웨어 모두를 합하여 컴퓨터라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인가? 육체는 하드웨어다. 그러나 그 하드웨어는 마음이라는 운영체계가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깨어있을 때의 마음과 잠들어 있을 때의 마음은 또 다르다. 장자는 잠들어 있을 때의 마음 상태를 교혼(交魂)으로, 깨어있을 때의 마음 상태를 형개(形開)로 표현하였다. 이는 현대 용어로 무의식과 의식의 작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잠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이런 마음 저런 마음들이 서로 대신하며 내 마음의 주도권을 잡아 행사하는데, 그렇다면 나의 실체는 바로 이 마음인가? 아니면 내 뼈와 구멍과 오장 육부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존재인가?



장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분명히 나의 참 주인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그 참 주인은 더하거나 보탤 것도 없이 완벽한 존재일 거라는 것이다.



2-3 무릇 말(言)이란 그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분명 말다운 것이 있다. 말을 했지만 말하는 뜻이 분명하지 않다면 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아직 하지 않은 것인가? 분명하지 않은 말은 새끼 새들이 지절대는 것과 다름이 없다.



도는 무엇에 가려져 참과 거짓으로 나뉘어지고 말은 무엇으로 가려져 시비를 가르는가? 도는 어디든 존재하여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말 또한 어디든 존재하여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데 참과 거짓으로 나누고 시비를 가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도는 소성(小成)에 가려지고 말은 영화(榮華)에 가려졌기 때문이며 유가와 묵가의 시비다툼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한쪽에서 옳다 하는 것을 틀렸다 하고 다른 쪽에서 틀렸다 하는 것을 옳다 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明)에 비춰보는 것만 못한 일이다.



만물은 모두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한 만물은 모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자기를 상대방이 보면 저것이 되고 자기가 스스로를 보면 이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을 서로 태어나게 하는 방생(方生)이라 한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이것이 성인이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의 빛에 비춰보는 이유이고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다.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함께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함께 있다.



그러면 이것과 저것은 따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함께 있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은 도추(道樞, 도의 회전축, 중심)에서 서로 대립을 넘어 사라진다. 도추에서 무한한 변화가 이뤄지며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고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다. 그러므로 시비로 대립하는 것은 밝은 지혜 (明, 명)를 따르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소가 울고 새가 지저귀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사람의 말은 이것들과 다른 분명한 뭔가가 있는데, 에너지가 있어 어떤 일을 현실화시키는 힘이 있다. 구약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하며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라 하니 공간이 생겨 생물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신의 말처럼 사람의 말 역시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어떤 에너지를 현실화시키는 특별한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시크릿’이란 책에서는 인간은 무궁 무한한 우주로 전파를 쏘아 보내는 하나의 송신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생각이나 말을 통해 내뱉어진 바램은 그 스스로 우주를 돌아 증폭되며 현실화된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고 항상 활기차고 희망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만물은 이것과 저것으로 나뉘지만 이것과 저것은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의 존재다. 너와 나는 다른 형체로 나뉘어진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에너지의 밀집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내가 행복할 때 내 주위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같이 행복해지고, 주위 사람이 불행할 때 나 역시 왠지 모르게 찜찜해지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행복은 한 가정의 행복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그가 속한 국가의 행복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조선시대 임금도 누리지 못한 각종 편의시설을 누리는 것처럼 인간은 그가 속한 시대 이상의 편의를 누릴 수도 없다.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고 밤에 잠을 자기에 낮에 생활할 수 있으며 죽음이 있기에 태어남이 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을 모두 제공받기 때문인데 어찌 죽음만은 싫다고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온전한 한 몸 받아 태어났으니 그것이 헤질 때까지 소중히 관리하여 잘 사용하고, 다시는 올 수 없는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도록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함으로써 태어난 보람을 찾고, 그리고 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자연에게 다시 이 몸을 돌려주고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런지.



2-4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말(馬)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밝히는 것 또한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하기에 그렇다 말하고 그렇지 않기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길은 다니므로 생겨나고 사물도 그렇게 불려지기에 그리 된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것을 그렇다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만물은 본래 그럴 연유와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럴 수 없는 것도 하나도 없다.



고로 작은 풀이든 큰 나무든, 못 생긴 여자든 서시(西施)와 같은 미인이든, 만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황당하다 할지라도 도라는 차원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이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만물은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통하는 하나다. 오직 도를 깨달은 사람만이 모두 통하는 하나를 깨닫고 용(中庸)에 머물 수 있다. 용(庸)이란 쓸모 있음(用)을 말한다. 쓸모 있다는 것은 두루 통(通)한다는 것을 말하고 통한다는 것은 깨달음(得)을 말한다. 정확히 깨닫는다는 것이 이것을 말하니,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하고 그러면서 그런 줄 모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힘써 모두 자신들의 주장을 하나 그것이 본래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조삼(朝三) 이라 한다. 조삼이 무슨 뜻인가?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며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 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분과 실리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화를 내니 이는 인간이 시비를 가리는 마음 때문이다. 성인은 옳고 그름을 조화시키고 천균(天均, 하늘의 균일법)에 머문다. 이를 일컬어 양행(兩行, 두 길을 걸음)이라 한다.



가장 지극한 경지는 아직 사물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것이고, 둘째는 사물이 생겨났으나 아직 경계가 없는 상태를 아는 것이며, 그 셋째는 경계가 생겼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 도(道)가 무너지고 도가 무너지면 애(愛)가 생긴다.



시작이 있으면 시작하기 이전이 있어야 하고 시작하기 이전의 이전도 있어야 한다. 있음이 있다면 없음이 있게 마련이고 또 그것 이전의 것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생겨났다. 있음과 없음 중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없는 것인가? 구별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본시 모든 것은 하나다. 있음과 없음도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한데 어찌 있음 속에 다른 있음을 구별할 수 있으랴.



도(道)에는 경계가 없고 말(言)에는 실체가 없다. 말로 인해 분별이 생겨나며 변론은 도를 보지 못해 생겨난다. 고로 성인은 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보통 사람들은 서로 돋보이기 위해 변론한다.



무릇 위대한 도는 이름이 없고 위대한 변론은 말이 없다. 위대한 인(仁)은 편애하지 않으며 위대한 겸손은 밖으로 드러내는 겸양이 아니다. 위대한 용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도가 드러나 보이면 도가 아니고 말도 변론만을 위한 것이라면 부족한 것이다. 인(仁)이 융통성 없이 굳으면 두루 퍼질 수 없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또한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때로는 반신불수가 되어 죽기도 하지만 미꾸라지는 그렇지 아니하며,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 밖에 없을 것이나 원숭이는 그렇지 아니하다.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먹는데 과연 이 넷 중에서 제대로 맛을 아는 자는 누구인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사슴도 그러하고 물고기도 그러하다. 모장이나 여희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깊은 물속 깊이 숨고 새는 날아가고 사슴은 도망간다. 이 넷 중에서 아름다움을 바르게 아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인의(仁義)의 시작이나 시비(是非)의 길은 이처럼 번잡하고 혼란한데 어찌 이런 것을 따지려 하는가?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아까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아까는 앉아있더니 지금은 일어서 있으니 왜 그리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하길, “내가 다른 것에 의지하고 그것이 또 다른 것에 의지하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뱀의 비늘이나 나비의 날개에 의존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또 어째서 그렇게 되지 않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살아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혹 미혹(迷惑)이 아닌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혹 어려서 집을 잃고 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여희(麗姬)는 애(艾)라는 고장의 국경을 지키는 자의 딸이었다. 처음 진나라에 끌려왔을 때는 너무 울어 눈물로 옷깃이 흠뻑 젖을 정도였으나 왕의 궁전에 들어가 왕과 잠자리를 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울던 일을 후회하였다. 죽은 사람들도 이처럼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런지.



어느 날 장주는 꿈을 꾸었는데 나비가 되어 허허연하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스스로 마음이 유쾌하여 하늘을 날아다님에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 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 화들짝 잠을 깨어보니 틀림없는 장주였다.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장주와 나비가 다른 것은 분명하며, 이를 일컬어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物化)라고 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여기는 것, 모두가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서시나 여희는 한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이었으나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사라진다. 염소는 거친 풀을 맛있게 먹지만 호랑이는 그렇지 않고, 식물은 이산화탄소로 호흡하여 생명을 유지하지만 생물은 그 식물이 싫다고 내버린 산소를 마시며 살아간다. 인간이 수천 년간 진실로 믿어왔던 천동설이 틀린 믿음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도 불과 몇 백 년에 불과하다.



이렇듯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자궁 밖으로 나와야 하는 태아에게 세상은 더 이상 두려울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이지만 그것이 또 다른 생활의 시작이듯, 죽어 이 몸을 떠나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른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아닐런지.



장주는 꿈 속에서 나비가 되어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은 현실과 다를 바 없었으며 유쾌하기 그지 없었으나 깨어보니 꿈이었다. 과연 장주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 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가? 이 세상에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염려와 후회를 하며, 변덕과 고집 속에, 아첨과 방자함으로, 터놓기도 하고 꾸미기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과연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렇지 않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