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은 바닥 완성도는 천장 옮김 09-07 13:02
<대왕 세종>은 이 시대 사극이 드러낼 수 있는 정치에 대한 가장 심도 깊은 사유를 잘 짜인 구성과 인물, 좋은 연기와 참신한 카메라워크로 보여줬다. 정치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한 수작이다. 시사인[51호] 2008년 09월 01일 (월) 10:53:54 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 ⓒKBS <대왕 세종>(사진)은 권력욕의 ‘질’과, 권력욕에도 불구하고 견지해야 하는 원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왕 세종>(윤선주·김태희 작, 김성근·김원석 연출)이 드디어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불멸의 이순신>과 <황진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작가 윤선주로서는, 이 드라마가 정치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가장 원없이 해볼 수 있었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르긴 해도 그에게 이런 드라마는 전무후무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처럼 낮은 시청률의 사극을 더 이상 제작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대왕 세종>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굴욕적인 시청률에만 모여 있었다. 초반에 20%를 넘던 시청률이 반 토막 나고 올림픽 기간에는 한 자릿수로 떨어지기에 이른 것이 꼭 채널 이동 때문으로만 볼 수는 없다. 물론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KBS 1TV 주말의 ‘정통 사극’ 시간대를 벗어나, 광고를 받을 수 있는 KBS 2TV로 옮기면서, 1TV의 9시 뉴스 시청자를 잃어버린 것은 치명타였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다.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이 작품은 높은 인기를 얻기에는 시청자의 머리를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비대중 드라마임이 서서히 드러났다. 결국 9시 뉴스를 포기하면서까지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열성 마니아만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이룩한 성취를 폄훼하기는 힘들다. 이 작품은 이 시대의 사극이 드러낼 수 있는 정치에 대한 가장 심도 깊은 사유를, 잘 짜인 구성과 인물, 좋은 연기와 참신한 카메라워크로 보여준 수작임은 틀림없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인 지점은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대개의 사극은 선인과 악인을 선명하게 구분해놓고 흥미진진하면서도 쉽고 편안한 대립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기 일쑤다. 혹은 처음에는 순수했던 주인공이 어느 틈엔가 정치라는 이전투구 판에 휩쓸리면서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타락한 인간으로 변모하다가 파멸하는 줄거리를 지닌 경우도 많다. ‘권력욕=악, 순수한 열정=선’ 구도 깨 어떤 식으로든 최근 사극 속의 정치란, 권력욕을 가진 탐욕스러운 인간이 만들어내는 권력 싸움일 뿐이며, 그 중 선인 한두 명만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싸움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드라마의 시청자는, 타락한 정치판 안에서 꿋꿋하게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주인공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염원하지만, 결코 성숙한 정치관을 갖게 되지는 못한다.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파워 게임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즐기면서, 정치란 결국 권력욕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으며, 정치는 사랑이나 진실 같은 인간의 심성을 희생시키는 나쁜 것이라는 정치관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대왕 세종>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정치하는 사람이 권력욕을 지니는 것을 당연하게 본다. 대신 이 작품은 그 권력욕의 ‘질’과, 권력욕에도 불구하고 견지해야 하는 원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서는 ‘권력욕=악’ 대 ‘순수한 열정=선’이라는 공식 구도가 깨어진다. 첫 시작부터 주인공인 셋째 아들 충녕대군의 권력욕은 꽤 놀랍다. 충녕은 정치 희생물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정치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자신의 정치관을 형성해간다. 중요한 것은 원칙과 태도이지, 권력욕이 있느냐가 아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그 시대의 중신과는 다른 원칙과 태도를 지닌 정치인이다. 그도 권력을 쥐자 아버지 태종처럼 권력을 휘둘러 정적을 제거하고 반대 여론을 무력으로 짓누르고 싶은 욕구를 수시로 느끼지만, 자기 원칙을 견지하며 그 권력욕을 적절히 제어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세종과 태종을 선악 구도로 몰고 가는 것도 아니다. 왕권 안정이 절대적이었던 초기의 왕은 ‘무자비한 칼잡이’처럼 처남과 사돈까지 제거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때로는 아버지 같은 정치를 펴지 않겠다며 덕성과 관용의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는 세종의 어설픈 이상론의 현실적 패배도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가 현자(賢者) 세종의 시대로 변해가고, 결국 덕과 관용의 정치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점을, 상왕인 태종조차 인정하게 된다. 단선적 선악 구도를 벗어난 인물들은 상당히 복잡하다. 처음에는 모두 충녕의 정적처럼 보였던 양녕, 그의 스승인 황희, 태종의 칼잡이인 박은까지도 결국 그의 지지자가 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런 반면, 세종이 키워낸 엘리트 부대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이 종종 치기나 아집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심지어 중전 소현왕후와 착한 딸 정소공주야말로 그 착한 심성 때문에 세종의 냉혹한 정치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 복잡다단한 인물과 사건은 정교하게 짜여 있어, 한두 회만 놓쳐도 이야기를 따라잡기가 힘들다. 이 복잡한 인물과 사건 속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정치의 본질을 질문한다. 정치란 게 무엇이며, 좋은 정치란 어떠해야 하는가. 권력욕을 견제하며 지켜야 하는 정치적 원칙은 무엇이며, 권력은 어떻게 써야 남용되지 않는가, 왕의 소신과 여론은 어떻게 조율되어야 하며, 전쟁과 외교에서 지켜야 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진다. 정치 행위 속에서 인간은 성숙해간다 이러한 질문은 사건을 통해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정치인이 던지고 답을 하기도 한다. 태종과 세종만이 아니라 원경왕후·하륜·황희·박은 등이 결정적인 순간에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정치에 대한 아포리즘이라 할 만하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정치가 권력자끼리의 파워 게임이 분명하지만,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 속에서 인간성은 훼손되고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정치 행위 속에서 인간은 보람을 느끼고 성숙해간다. 남성 작가들이 끝없는 파워 게임의 사극에 몰두할 때, 정치 속에서 성숙해가는 인간을 그려내는 경향을 김영현(<대장금> 작가)과 윤선주라는 여성 작가가 보여준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나 바로 이런 짜임새와 성찰이야말로 이 작품의 시청률을 높일 수 없도록 만드는 요소이다. 하지만 권력 속의 인간에 대한 성찰이 <하얀 거탑> <쾌도 홍길동>을 거쳐 <대왕 세종>에 이르며 한층 깊어졌다는 것은 우리 모두 기뻐할 일이 아니겠는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이 대한민국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