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에 자영업 실패 또다시 취업 하려는데 "더 좋은데 갈수있으면서 왜 다른사람 자리 뺏나"



2009년 국내 굴지의 대기업 부장으로 퇴직한 이 모씨(54ㆍ충남 천안시). 은퇴 후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부동산중개사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입사를 위해 건물관리 용역회사 등에 원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력과 대기업 간부 출신이라는 이력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이씨는 "면접만 가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서 왜 이런 곳에 취직해 다른 사람 자리를 뺏느냐'는 반응이 태반"이라며 "주위에서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이씨는 자신보다 학력이나 학벌 모두 떨어져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부산에서 큰 숯불갈비집을 운영하는 고향 친구가 부럽다. 이씨는 "대기업에 다닐 때 친구가 부러워 했지만, 인생을 길게 볼 때 결국에는 그 친구가 승자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매서운 일자리 한파에서 명문대를 나와 기업 간부까지 지낸 고학력 은퇴자들의 체감온도는 더 낮다. 심각한 청년 실업과 맞물려 더욱 좁아진 중장년 취업 문호는 '한때 잘나가던' 고학력 은퇴자들에게는 바늘 구멍과도 같다.

지난 11일 낮 12시 22분께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서울역 방향에서 들어오던 전동차에 몸을 던져 숨진 김 모씨(55)도 은행 간부로 승승장구하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당시 명예퇴직한 후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하다 끝내 목숨을 끊은 사례다.

상당수 은퇴자들이 제2의 인생을 위해 뛰어드는 자영업도 해결책이 되기 힘들다 보니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때 잘나가는 대기업 계열 보험사 임원이었던 조 모씨(59)는 2010년 초 명예퇴직이라는 칼바람을 맞고 회사를 나와야 했다. 퇴직금을 바탕으로 서울 마포구 일대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해봤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지난해 10월 가게 문을 닫았다.

구인광고를 보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조씨의 이력을 사겠다는 업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씨는 "보험업계에서 잔뼈가 굵어 같은 직종을 알아봤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며 "취업을 못한 아들(29)도 걱정이지만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딸(25)의 학자금 마련이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일선 직업소개소에서도 고학력자들은 찬밥 신세다. 서울 연희동 C직업소개소 박숙희 실장은 "찾아오는 사람들 중 10% 정도는 대졸자들"이라며 "고학력을 속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학력 구직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 북아현동 또다른 직업소개소 조범휘 대표는 "주로 공사현장에 나가는 일을 주는데 고학력 구직자는 대부분 초보자기 때문에 인력시장에서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강성수 서울 양천구청 희망일자리지원센터 과장은 "주로 경비, 청소, 요양 업무 관련 구인업체들은 고학력자나 기업 경력자들을 찾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선 직업소개소나 구청 단위 일자리센터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학력 중장년 구직자들은 서울메트로나 시설관리공단 등 안정적인 직장의 기간제 자리가 나오는 서울시 일자리플러스센터로 몰려 들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년간 이곳을 찾은 중장년층 중 80% 이상은 고졸 이상. 대졸 이상도 33.6%로 3명 중 1명꼴이다.

강지화 서울시 일자리플러스센터 고령자팀장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면 본인들 '스펙'에 맞는 자리가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커서인지 고학력 중장년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전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학력 은퇴자들은 조직의 높은 곳에 있다가 일용직으로 한순간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다"며 "현재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지금 청년들도 현재의 중장년 퇴직자들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진형 기자 / 안병준 기자 / 이용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