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웃고 불의에 울고, 때론 시국과 부딪치고 시국에 갇히면서 살아온 ‘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감옥에서 고위 관직까지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그는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남들이 피해 다니는 어렵고 힘든 길을 꿋꿋이 걸어간 그와 함께 시국 사건의 현장, 현대사의 한 자락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산과 하늘로 둘러싸여 있던 전라북도 동북부의 첩첩산중 진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힘든 시기였고, 특히 산간 지역은 더 황폐하고 어려웠어요. 일본에게 수탈을 당하다 보니 사는 것이 아주 비참했거든요. 저 또한 그런 환경에 놓여서 미래를 향한 꿈을 꾸기도 어려웠죠. 청운의 뜻은 품을 여지도 없었고, 초등학교를 나온 후엔 그 이상의 진학을 포기하고 싶었어요.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산에 가서 나무나 해야겠다며 작심을 하고 지냈는데 결국 부모님 설득에 못 이겨서 진학을 하게 되었어요.

옛 시절을 떠올리면 아름답고 좋았던 기억보다는 가슴 아픈 것이 더 많아요. 초등학교 5학년까지 일제 교육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농촌의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줄곧 고학을 했어요. 해방 후 혼란기를 겪었고, 고등학교 때는 6·25가 일어나서 힘들었고, 또 휴전 후에는 나라가 피폐했을 때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여러 모양으로 고학을 했어요.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죠. 신문 배달부터 시작해서 잡지도 팔아 보고, 전주역에 가서 좌판 메고 승객들에게 물건도 팔았고요. 도장집에 가서 도장도 파고, 프린트 필경도 하면서 살았죠. 그렇게 젊은 시절을 어떤 낭만이나 아름다운 추억도 없이 한 시대의 혼란을 다 겪어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산간 지역에서 고학하며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라온 것이 제 인생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제가 살던 곳은 이제 용담댐 수몰 지역이 되어 마을 자체가 다 없어져버렸어요. 지금 찾아가 보면 댐의 수면만 보이죠. 정말 기가 막혀요. 그리워도 찾아갈 고향이 없어졌으니까요. 저의 지난 추억은 그렇게 제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죠.

1970년대 초입에 인사동의 ‘통문관(이름난 고서점)’ 2층에 있는 ‘검여(劍如) 서실’에 다니면서 먹을 갈고 서예의 기본을 좀 배웠어요. 그 서실을 운영하셨던 분이 금석학자이자 서예가로 유명하신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 선생이셨는데, 그분께서 아호를 내려주셨죠. ‘백성 민(民)’에 ‘뫼 산(山)’, 산민(山民)으로요. 제가 산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어주신 이름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 써주신 휘호에 ‘한승헌 선생 근재산민(近在山民)’이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서민 또는 민중들과 가까이 있을지어다.’라는 뜻이었어요. 사회적 약자, 소외 받는 계층, 불우한 사람들을 멀리하지 말라는 당부였다고 생각해요. 결코 풍류나 덕담 차원의 아호가 아니었던 거죠. 저는 검여(劍如) 선생께서 일깨워 주신 ‘산민정신’을 지금껏 소중하게 마음에 새기며 살아오고 있어요. 아주 담백하면서도 깊은 뜻이 담겨있는 제 아호를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다른 아호를 누가 지어줘도 절대 받은 적이 없을 만큼 아끼고 있죠.

젊은 시절 시 안 써본 사람이 없고 시인 아닌 사람이 없죠. 저도 고등학교와 대학 다닐 때 습작으로 시를 썼어요. 대학 시절에는 대학신문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신문에 실을 원고가 모자라서 여백이 생기면 급하게 채워 넣기 위해 제가 쓴 글이나 시를 실은 적도 여러 번 있고요. 그러다 보니 계속 습작을 하게 됐죠.

그 후 시집을 두어 권 냈지만 문학으로서의 시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시 쓰는 변호사나 시인이라고 말하면 민망하고 쑥스러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저를 변호사이면서 문인이라고 소개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제가 반드시 거기에 토를 답니다. ‘무인(武人)’이 아니라는 뜻에서는 ‘문인(文人)’이지만 문학을 한다는 의미로는 전혀 근처에도 간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전주에 있는 전북대학에 들어갔는데 법학과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정치학과 지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3학년쯤 되니까 취업이 걱정되더라고요. 지금도 취업난이 대단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 중반은 더 치열했어요. 한국전쟁 휴전 직후의 우리 사회상을 생각해보세요. 어디든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가 고등고시를 합격하면 취직 걱정은 면한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고등고시(지금의 사법고시)를 보게 되었죠. 처음에는 너무 성급하게 시험장으로 갔다가 실력 부족으로 떨어지고, 두 번째에 합격해서 지금까지 법조인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법조인의 길로 들어선 직후, 젊은 시절에는 검사로 활동하다가 5년 만에 변호사가 되었어요. 검사는 아무래도 제 적성과 맞지 않는 것 같았고, 평범한 변호사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가 차츰 강화되면서 거기에 반대하고 저항하던 사람들이 전부 시국 사범으로 잡혀가더라고요. 제가 아는 분도 잡혀가고, 필화 사건으로 작가가 재판을 받기도 하는데 그걸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법정에 나가게 됐는데 그게 의외로 장기화되고 또 시국 사건이 계속 양산되니까 어쩌다 보니 5년, 10년, 20년 계속 시국 사건 변호를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시국 사범 전문 변호사처럼 되어버렸죠. 사실 그건 제가 정의감이 대단했거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무렵에 정부가 미워하거나 탄압하는 그런 사건들을 맡으려고 하는 변호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라도 어떻게든 해봐야지' 그런 어설픈 생각을 가지고 법정이나 구치소를 드나들었던 겁니다.

그렇게 그들을 위해 법정에 설 때 제 변론의 목적은 억울함을 푸는 것이지만, 설령 그것이 판결에서 안 통하더라도 분명한 사리와 정의를 재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벌거벗은 권력 앞에 외롭게 서있는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는 우군이 되어주자, 그리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재판 현장을 후세에 알려 주는 증인이 되자는 목적으로 변호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죄가 될 것도 유죄가 돼버렸어요. 어떤 정치인은 징역을 살고 와서는 "당신이 변호한 사건 치고 무죄 받은 사건이 있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내가 변호한 사람 중에서 징역 가면서 인사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리고 내가 변호한 사람 치고 석방 안된 사람이 없다. 최소한 만기 석방은 다 되더라"는 말까지 했죠. 뜻은 있었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던 변론이었습니다.

시국 사건은 그 자체가 집권자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서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편파적인 수사와 재판을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대부분 황당한 면이 많았죠. 제가 변호한 시국 사건이 100건이 넘는데, 그 중 하나를 꼽자면 1974년에 있었던 민청학련사건을 들 수 있죠.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으로 불리는데, 민청학련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에는 학생의 무단 결석이나 시험 거부도 사형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었어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그 당시 학생과 젊은이들을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며 잡아간 겁니다.

유신헌법 개정을 주장했다고 해서 군 검찰이 긴급조치 1호를 걸어 기소하고 15년 구형을 하면 바로 다음날 군법회의에서 15년 형을 선고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삼각지 군법회의에서 확립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힐난했고, 그 후 ‘정찰제 판결’이란 말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한 재일동포 유학생이 방학 때 일본에 가서 “한국에서는 혼ㆍ분식 장려로 대학 근처에 분식집이 많다”고 한 것도 한국의 식량 사정에 대한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서 유죄의 증거로 써먹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민청학련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만 해도 180명 되는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유신 통치에 반대하던 젊은 세력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법률도 아니었던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이름 하에 많은 젊은이들이 고문당하고 옥살이를 했죠. 그것과 관련해서 근자에도 거론되는 인혁당재건위사건 때문에 8명의 사형수가 형 집행을 당하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사건이죠.

모두 다 잊을 수 없죠. 그렇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인혁당과 민청학련사건의 연관성을 조작하기 위해서 민청학련사건의 피고인으로 세웠던 여정남 군입니다. 경북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의 젊은이였어요. 제가 여정남 군을 변호했는데, 대통령 긴급조치의 위헌성과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임을 강력히 주장했는데도 불구하고, 8명을 사형집행 할 때 그 여정남군이 거기에 포함되어서 형 집행을 당한 겁니다. 제가 많은 양심수 시국 사범의 변호를 맡았었지만 사형 집행까지 당한 피고인은 여정남 군이 유일해요. 비극의 주인공이죠.

1975년 4월 9일 새벽, 여정남 군을 포함한 8명의 사형이 집행되던 그 시각에 변호인인 저 역시 반공법 위반으로 묶여 들어가 같은 구치소에 있었습니다. 그때 여정남 군이 형장으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저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되어서야 기결수들이 와서 알려주는 거예요.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피눈물 나는 일이었어요. 아직까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누구 한 사람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이름이라도 밝혀내야 하고, 수사와 소추, 재판을 맡았던 사람들은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 일반적으로 민주화나 인권을 내세우고 운동한 사람들은 다 핍박을 받을 때였죠. 도청, 연행부터 시작해서 회유, 협박 그리고 심한 경우는 붙들려가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변호사니까 함부로 못할 줄 알았는데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게 됐죠. 1975년에는 필화 사건이었던 김지하 재판에서 손 떼라는 걸 거부했더니 남산(당시 중앙정보부)으로 끌고 갔어요. 결국 반공법으로 기소를 해서 9개월 정도 감옥에 있었지요. 또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되어 고문을 당했어요. 그때 군사재판을 받고 1년 동안 징역을 살았습니다.

그럴 만한 죄를 짓고 잡혀갔으면 괜찮은데, 억울한 사람들 변호하면서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발언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탄압을 받으니까 참 억울했어요. 그러나 역사의 큰 장을 놓고 보면 그때는 모두가 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희생을 감수하던 시기였으니, 그 측에 끼게 된 것이 결코 불행한 일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탄압과 투옥, 고문 등은 모두 제가 원해서 겪은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감옥이 원서 써내고 가는 곳이라면 절대 안 갔을 거예요. 무도하게 끌고 가서 무조건 고문을 가하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이 없으니 그 공간에서 나름대로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 혼자의 힘이나 의지로만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항복하지 않고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항복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수사 단계에서는 괜한 날조된 행위를 그대로 인정하라고 강요합니다.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산 지하실에서 몽둥이세례를 받기도 했어요. 그 고문을 못 이겨서 사실이 아니어도 그렇다고 시인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정말로 제가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마디도 시인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감옥에 가서 형을 살게 되면 반공법 위반이라며 전향서를 쓰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전향하면 어디로 가나 싶어서 못 쓰겠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각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시인 안 해도 되니까 “나가서 법 잘 지킨다”고 한 마디만 쓰라는 거예요. “그런 거 안 써도 법 잘 지키겠다”며 끝내 안 썼더니 나중에는 지방으로 이감을 시키더라고요. 제 나이 오십쯤 됐을 때는 소년 교도소에서도 살아봤습니다. 고통스러운 것만 생각하면 이런저런 길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는데 제가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발을 잘못 디디면 모든 삶이 허사로 돌아갈 것 같았어요. 또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까 끝까지 버텨야겠다는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해방 후 6·25를 겪고, 그 뒤 독재정권 하에서 헌법까지도 휴지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해방 후, 60년 사법의 낡고 흐트러진 모든 제도를 리모델링한 겁니다. 국민을 진실로 위하는 사법, 나아가서 국민이 사법의 객체에서 주체로까지 격상하는 사법, 예컨대 배심재판이라든가, 올바른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적인 구조 개혁, 이런 일을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보통 모든 게 국민을 위해서 한다고 하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을 위한 사법’에서 ‘국민에 의한 사법’으로 갈 때는 대단한 변화가 있는 겁니다.

종래의 사법 재판은 직업 법관들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외국에서는 배심재판이라고 해서 직업 법관이 아닌 일반 시민이 재판에 참여하죠. 우리도 그렇게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국가 삼권 중에서 사법부만 대표성이 없어요. 대통령도 직선하고 국회의원도 국민이 선출하는데 법관 선출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법부의 대표성이 취약한 점을 메우고, 또 직업 법관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반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것이 맞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국민에 의한 사법이 이루어졌어요. 그건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지금은 시험 단계이지만 점점 더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무엇보다 법치주의에 대해서 오해와 왜곡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통치권자나 지배자가 국민들에게 준법 훈계를 하는 건 법치주의와 별개입니다. 오히려 국민들이 정권을 향해 법에 입각해서 통치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만약 국민에게 법 지키라고 하는 것이 법치주의라면 나치 히틀러라든가 일제강점기 때 법치주의가 가장 잘 됐겠죠.

아래에서 위를 향해 법을 지키라고 외치는 것이 법치주의인데, 지금은 그 방향이 정반대거든요. 그걸 바로잡아야 합니다.이런저런 현실적인 병폐를 이유로 개헌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헌법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정치인들의 체질과 정치 풍토를 바로잡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올바른 헌정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 방향으로 가야 하며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평가는 아주 과분하고, 옳지도 않다고 봅니다. 다만 저는 직업이 변호사였기 때문에 재판이나 구속자들을 상대로 일을 한 것뿐이에요. 다른 분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저항하다 고난을 당하기도 했거든요. 저는 변호사니까 재판에 드나들었을 뿐이고 일종의 분업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너무 과장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저로서는 아주 당혹스러워요.

다만 시국사범 변호를 모두 꺼리고 어려워할 때 “나라도 해야지”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제 스스로는 대견스러웠다고 생각하죠. 주변에서 ‘인권변호사’란 말을 많이들 하시는데 사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인권변호사’라는 말입니다. 변호사는 원래 인권을 지켜주고 찾아주는 것이 직분인데, 거기에 ‘인권변호사’라고 붙이면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은 신문에 연재했던 것을 조금 보완해서 낸 책인데요, 여기서 한 변호사는 제 성씨를 붙인 게 아니고 영어의 부정관사 ‘a’입니다. 어떤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이라는 뜻으로 제목을 붙였죠. 제 자신에 대한 고백도 있고, 제가 만났던 많은 시국사범, 그 밖의 제가 알게 된 의로운 분들의 삶을 증언하는 부분이 담겨 있어요. 물론 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도 쭉 깔려 있지만 자서전치고는 다른 분들의 이야기가 훨씬 많이 들어있죠. 여러 가지로 미흡하지만 그래도 신문 연재를 계기로 해서 그 정도로 정리된 책이 나왔다는 게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한승헌 변호사의 변론사건 실록]이라는 책은 1965년에 변호사 되고 나서 40년 동안에 걸쳐서 변호한 사건 중, 어느 정도 정리된 자료와 본인의 수기를 받을 수 있는 사건만 약 70건을 추려서 7권의 책에 담아낸 일종의 변론사건 실록이죠. 매 사건에 대해서 제가 해설을 쓰고 공소장이나 판결문, 진술서, 그리고 본인의 입장을 정리한 수기가 들어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실록, 자료, 기록이 참 중요한데 그걸 집대성한 거죠.

시국이라고 한다면 각종 선거와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위정자의 잘못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위정자를 뽑은 1차적 주권기관인 국민들이 정말 올바른 선택을 했는가, 아니면 합리성이 결여된 그릇된 선택을 해놓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은 없는가 돌이켜봐야 합니다. 국정과 지도자의 잘잘못 가운데는 그들을 잘 뽑지 못한 국민의 책임이 절반 이상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국민을 상대로 듣기 좋은 말만 하는 후보라든가 정치인들을 우리가 식별할 수 있어야 돼요. 우리가 뽑아놓은 정치인들을 제대로 부릴 줄 알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올바르게 선택하고 뽑은 다음에는 나라 일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도록 부단히 감시하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묻는 이런 풍토가 확립이 되어야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사회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평등의 문제, 양극화의 문제인데 이런 것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나 정치 세력이 나타나야 바른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차츰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독재, 탄압 치하에 비해 민주주의가 많이 되살아났고 가난과 설움에서 벗어나 물질적인 생활도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그러니 이제는 우리 삶에 합당하고 이 시대에 알맞은 국민의 의식 수준이 필요해요. 여건이 좋아진 만큼 더욱 발돋움할 수 있는 그런 국민 의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죠.

우리 사회는 정치 과잉 때문에 모든 것이 정치로 구분이 되고, 정치의 폐단이 일반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이런 걸 어떻게 좀 막아 봤으면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결국 좋은 정치가 좋은 사회를 만들고, 좋은 국민이 좋은 정치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궁극적으로 우리 국민들이 이 사실을 자각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집권자도 긴장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유머의 진가는 세상이 각박하고 웃을 일이 별로 없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것 아닌가요? 풍족한 상황에서 기쁘고 행복해서 웃는 건 유머와 깊은 관계가 없습니다. 체면치레 문화, 엄숙주의, 또는 막말 정치 같은 것에서 우리가 해방이 되고, 좀 더 넉넉한 여유로움을 바탕으로 서로 화목하게 하나 되는 마음을 형성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생활이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을 저는 유머 내지 해학이라고 생각해요.

해학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많이 있는데 의외로 그것을 소홀이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사실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하고 연구를 깊이 하다 보면 철학이 나오지 유머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답답한 세상, 정색을 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해방되고 싶은 본능이 내 안에 잠재돼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 기질을 어디서부터 물려받았는지 떠올려보면 제 어머니가 아니었나 싶어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촌부셨지만 재치 있는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늘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셨죠. 저 또한 어머니께 물려받은 DNA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유머는 일상의 삭막함을 치유해 줍니다. 평화적이고, 원가도 들지 않는 데다, 면세라는 장점도 있죠. 외국에선 아무리 격조 있는 행사라 해도, 주최 측이 올라가 이야기할 때 1~2분 내 웃기는 말을 꼭 던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은 뒤에 메인 행사에 들어가는 거죠.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지도층에서부터 너무나 엄숙합니다. 정치인들이 여유를 가지고 유머를 좀 알아야 하는데 여의도를 보면 유머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거든요. 유머의 만인화! 이게 저의 바람입니다.

제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잘 견뎌내는 편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악재 속에서도 견뎌낸 것을 보면 검증이 됐다고 봅니다. 항복하지 않은 채 뜻을 굽히지 않고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 감사하죠. 물론 저 혼자의 힘만은 아니었지만요. 그것이 저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 다음에 결점이라면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체계 있는 학문을 세우지 못했다는 거예요. 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경지에까지 올랐더라면 변호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방송을 할 때 더 많은 사람에게 보람과 유익을 줄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던 것에 핑계를 하나 대자면, 시국 사건을 변호하거나 세상 풍파와 부딪치며 살다 보니까 차분한 연구나 독서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게 가끔 제 약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가족들한테는 미안한 게 많죠. 보통 변호사 집안이라 그러면 유복하게 잘 사는 걸로 아는데, 저는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살림을 보장해 주지 못했어요. 시국 사건을 많이 맡다 보니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징역도 살아서 가족들의 고통이 컸죠.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제가 집에 들어가면 발언권이 약합니다. 가족들을 위해서는 크게 한 일이 없으니까요.

특별히 가족들에게 감사한 것이 있다면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제 발목을 잡지 않고 오히려 격려해 주고 믿어 줬다는 거예요. 혹시라도 제가 힘든 걸 이기지 못해서 주저앉을까 봐 부축해 주고 일으켜 주고, 아내와 자녀들이 저를 밀어주고 이해해 줬어요. 그 고마움은 말로 다할 수가 없죠.

전문가들만 법을 알면 되고 그 외의 사람들은 법을 잘 몰라도 된다는 생각들이 만연한데, 이제는 모든 국민이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법치주의의 올바른 모습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의 뜻이 올바르게 입법에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 제대로 뽑아야 돼요. 궁극적인 법의 출발은 국민이고, 그 빛과 그림자가 궁극적으로 미치는 데도 국민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좀 더 각성하고 참여하고 감시할 수 있는 그런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해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과거 잘못된 판결은, 물론 집권자의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거기에 협력한 법조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릇 법조인은 정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해야 할 기본적인 사명을 지녀야 하고, 민주주의의 보증인으로서 자기 소임을 다해야 해요. 법의 이름을 빌어 권력에 영합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법의 정신은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저는 특별히 지식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지식을 파는 지식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식을 많이 쌓고, 또는 지식을 넘겨주고 공유하는 건 좋은데, 그 지식을 가지고 득을 보려거나 세속적인 이익을 탐하는 데 써먹지 말라는 거죠. 누구든 양심과 신념을 지키는 게 쉽지 않고 또 여러 가지 위험한 고비들이 있겠지만, 지식인이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나라에도 기여하는 일이라고 보거든요. 세상에서 기대하며 바라보는 시선들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자세가 필요해요. 지식인들의 쇠퇴나 실의에 편승해서 왔다 갔다 하느라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거나 또는 제자들에게 빈축을 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한 시대를 이끄는 양식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자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약자를 어루만지는 그러한 사람이어야 해요.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지조 없는 지식인이 빈축을 사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스스로가 지조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야 해요. 나아가서는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있지 않은 일에도 관심을 가질 줄 알고, 사서 고생을 할 줄 아는 이들도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 나와야 역사가 좀 더 나아지고 바로잡히며 향상되거든요. 자기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사서 고생하는 지식인이 많아지면 우리 세상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질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성은 있어요. 저는 지금도 두 부류의 지식인들이 있다고 보는데 각자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 해답이 나올 거예요. ‘내 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서 나를 바친다’는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군가에게 기억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누군가가 저를 기억한다면, “한승헌은 참 열심히 살다간 변호사다.” 그렇게 제 이름 석자를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로서는 과분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