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것들 구름길 09-09 18:55
“글쎄, 내가 껴들어서 어색하지나 않을까, 동호회라면.” “괜찮다니까. 맘 내키면 이 참에 가입해도 되고.” 친구는 자기가 총무를 맡고 있는 골프 동호회의 정례 라운드에 가자고 전화를 하더니 급기야 집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겸사겸사 교통 사고로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한 집사람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며 친구는 부인까지 동행해 왔다. “하도 연습을 안 해서 공이라도 제대로 띄울 란지……” “아따, 안 뜨면 어때. 굴리면 되지 뭘.” 친구 부인이 차를 끓이는 동안 과일을 깎던 아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병원 수발하느라 한번도 못 갔는데 다녀 오세요.” 그렇게 엉겁결에 나가게 된 라운드는 석 달 공백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래도 인 코스에서는 그나마 조금 맞아주어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파3인 17번 홀에서는 언감생심 난데없이 버디까지 해버렸다. 알 수 없는 것이 골프이고, 그래서 골프는 인생살이를 닮았다고 하나보다. 여느 동호회 모임처럼 클럽 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간단한 샤워 후에 친구와 함께 그릴로 갔다. 매암바위의 화려한 절경을 가진 망월봉의 이름을 딴 망월룸 연회장이었다. 3팀으로 모두 12명인 동호회 모임에 누군가 한 명이 갑자기 입원을 하는 바람에 내가 땜빵을 한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다른 조의 사람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데, 맞은 편 숙녀분 중 한 사람이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일견 낯이 익다 싶은데 누군지 확실히 떠오르지 않아 눈만 껌뻑 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녀가 다른 사람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머뭇머뭇 말했다. “제실 어멈……알지요?” "제실 에미 불러 오이라.” 할머니의 약손도 효험이 없고, 여전히 끙끙 앓는 우리들의 치료를 위해 처방 되는 다음 수순이었다. 외가 쪽으로는 가톨릭을 믿었지만 할머니는 불교였다. 우리 마을과 건너 마을 중간쯤 외진 곳에 솔방울 엎어놓은 것처럼 나지막한 집에 제실 어멈은 내 또래 어린 딸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심부름 중에서 제일 신나는 심부름이 제실 집 심부름이었다. 제실 어멈이 준비하는 동안 나는 사립 밖에 서서 아지랑이 피는 들판을 바라보기도 하고, 햇볕 잘 드는 장독대 옆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공기 놀이를 하는 계집아이를 훔쳐 보기도 했다. 그 아이는 나를 쳐다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 가시지요.” 제실 어멈의 얼굴에서 화장품 냄새가 났다. 냄새도 향긋하니 좋았지만 참으로 예쁜 제실 어멈이었다. 계집아이도 자기 어머니를 따라 나선다. 몇 발자국 뒤 쳐져서 어머니의 치마폭에 감싸이듯 걸어가는 계집아이 뒷모습을 쳐다보면 마치 내 가슴에 복사꽃이 막 피어나는 것 같았다. 자운영 꽃이 지치듯 피고 아지랑이가 김처럼 피어 오르는 길을 두 모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일부러 발길을 늦추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은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더 예뻤기 때문이다. “퍼뜩 오이소, 도련님!” 뒤쳐지는 나를 향해 제실 어멈은 채근을 했다. 제실 어멈은 늘 나에게 말을 높였다. 그럴 땐 왠지 멋쩍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 제실 어멈은 환자의 머리도 만져보고 배도 만져보고 손도 만져 보았다. 증세가 가볍다 싶으면 윗목에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쌀 한 됫박에 실타래 한 꾸러미 얹어 놓고 빈다. 좀 높은 낭랑한 목소리로 삼신 할미에게 비는 손결이 곱기만 했다. 저렇게 목소리가 예쁘니 삼신 할매가 안 들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훠이~ 훠이~” 제실 어멈은 물속에 잠근 손에 물방울을 문 살에 찰찰 뿌리거나, 쌀을 한 줌 집어 동서남북에 흩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빌기가 끝나면 쌀 됫박은 자루에 담아 제실 집으로 가져 간다. 그것이 일종의 치료비인 셈이다. 근심스런 눈으로 할머니가 제실 어멈에게 물었다. “우떻노?” “괜찮것네요.” 그뿐이었다. 그 날로 나은 것도 같고 다음 날 나은 것도 같고 안 나은 것도 같고......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정확한 기억은 없다. 동네 사람들은 너나 없이 제실 어멈 신세를 가끔 졌다. 증세가 심하면 떡시루도 해놓고 북어도 준비하고 쌀 한줌을 하얀 보자기에 싸매서는 이마에 문지르면서 뭔가를 열심히 주문을 왼다. “마니 묵었는가?” “예! 많이 먹었네요.” 보자기에 꼭 싸맨 쌀 주머니가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 쌀 주머니가 한쪽으로 많이 쏠려야 제실 어멈의 빈 효험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마냥 쓸데없는 짓거리지만 그땐 그것이 처방이었다. 시내 병원을 간다는 것은 죽을 병 아니면 엄두를 내볼 수 없던 시절이니까. 그래도 우리 집에서 굿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4. 제실 어멈은 참 신통한 여인이었다. 건넌 마을 창식이네 누님이 가출 했을 때 동쪽으로 갔다고 쪽집게처럼 집어냈다. 창식이 아버지가 부산 어느 다방에서 일하는 딸 머리채를 잡아 찾아 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제실 어멈의 그런 영험에 혀를 내 둘렀다. “우찌 맞찼을꼬?” “눈을 착 감으모 훤히 보이는 갑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랬다. 그 시절 서부 경남 사람들이 갈 데라곤 가까운 동쪽이 손 쉬울 때였고 동쪽이라면 마산 부산 밖에 달리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마산은 좀 가깝고 부산은 마산가는 길의 곱절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아랫마을 영석이네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어 야단이 났을 때 제실 어멈이, “물귀신한테 잡혀 갔구먼!” 했다. 술 좋아하는 영석이 아버지가 장에서 술을 꽤 마시고 달밤에 비틀비틀 오다가 저수지에 빠져 익사했고 그 시신은 다음 날 떠올랐다. 그러나 가끔씩 틀리기도 했는데, 감나무집 아저씨 취직 날짜를 재작년 봄에도 작년 봄에도 그리고 금년 봄에도 못 맞추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제실 어멈에게 트집 잡거나 욕을 하는 사람을 없었다. 제실 어멈은 시골 사람들의 위안이었고 맺힌 가슴을 풀어주는 영험한 사람이었다. 우환이 있으면 제실 어멈은 울긋불긋 치렁치렁한 옷을 걸치고 고사도 지내고, 동네 어느 집의 잔치 날에는 장구치고 소리도 했다. 그때마다 제실 어멈의 딸은 잔심부름하며 엄마가 하는 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댕기 머리 길게 내리고 검정 치마에 흰 적삼 받쳐 입은 조그마한 계집아이는 인형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구경간 나와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부끄럼이 석류꽃 피듯 했다. 5. 중학교에 입학하고 읍내로 이사하면서 다시 볼 수 없었지만 내 눈에는 제실 어멈보다 더 예뻤던 그 여자 아이의 얼굴이 가끔씩 떠올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고향에 들렀다가 들은 소문으로는 제실 어멈의 정분 소식과 함께 모녀가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던 그 아이가 제실 어멈처럼 어미의 길을 뒤따라 갔는지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막연히 그녀가 대물림 할 수 밖에 없는 무당의 운명을 받아 들였지 싶었다. 한동안 하얀 얼굴에 동그란 눈동자, 분홍빛 볼이 아련히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세월이 유수와도 같이 흘러갔다. 그런데 그 날, 어느 골프 동호회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난 것이다. 제실 어멈보다 더 나이가 들었겠지만 그녀는 자기 어머니를 빼 닮아 있었다. 세월에 바래 변해버린 나를 한눈에 알아보는 것도 불가사의였다. 가을날 퇴색된 이파리가 신록의 그 푸른 엽록소를 어찌 간직하겠는가. “긴가 민가 했는데 이름 들으니 알겠대요. 흔한 이름이 아니라서……” 나중에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그녀의 남편은 판사 출신 변호사인데 지역 법조계에서 모두들 알아주는 실력에 올곧은 인품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유복한 가정의 안주인인 그녀에게서 그 옛날 궁상스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골프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 팔자도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고, 어느 모퉁이에서 어떻게 조우할 지 모르는 것이 또한 우리네 인생살이가 아닐까. 주식 또한 뜻대로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우리가 그 움직임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