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이기섭 09-09 19:00
손바닥 만한 유리가 붙여진 창호지 문을 열면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한 샘보리 앞 벌판이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납니다. 아침에 아버지의 가래통을 비운 후 사립문을 다시 들어서는 소년의 눈에 식구들의 아침밥 짓는 부엌연기가 파란 하늘로 솟아 오릅니다. 그 연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이 몸과 마음도 앞으로 얼마 후면 무너져가고 있는 흙집에서 오래전에 피어 올랐던 그 연기처럼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또 잊혀지고 말겠지요. 시골에서 개구쟁이로 자라나 자랑스러운 것 하나 없이 부끄러운 일 뿐인 저의 삶에서 그래도 조금 덜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보잘것 없는 재주를 바탕으로 이 곳에서 귀한 선생님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른지요. 어리석고 실수 많던 20 대의 몸이 40 대에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도 허물과 잘못이 하루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고개를 들기가 부끄럽습니다. 내 것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실은 내 것이 아니며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스스로의 허물들만 유일한 내 것으로 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