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과 숨겨둔 이야기

이번 명절에도 설날 3일전부터 시골의 종갓집인 시댁에 내려와,

시어머님의 지휘아래 제기 닦는 일부터 제사 음식장만과 그 많은 친척들의 음식상 차려내고,

밤늦게 까지의 부엌일까지 쉴사이 없이 일에 묻혀 있었다. 

4일 연속 일하다 보니 다리도 붓고, 온몸이 쑤시는 통증에 밤에는 끙끙 앓기 까지 하는데도,

남편은 내가 하는 일이 며느리로서 의당히 해야하는 본분이라는 듯이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도 한번 없었다.

고향에 내려와 머무는 동안 내내 술에 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남편의 태도 역시 못마땅 하였다.

명절 일을 다 치르고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나는 남편에게 뾰쪽하니 한마디 하였다.

"차남이라 장손며느리 보다는 그래도 나을 줄 알았는데, 3년 안에 귀국 하신다고 하던 형님은 5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니 어떻게 된 겁니까?"

"형님이 귀국을 하셔도 형수님은 대학교수직을 핑계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기대를 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오"

남편의 대답이 너무 황당하였다.

"아니 그러시면, 결혼 전에는 3년만 고생 하면 맏며느리도 귀국하니 그 때 까지만 힘들어도 참고 잘하라고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은 뭐예요?"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는 남편에게 나는 화가나서 따졌다.

"아니 그러면 장손며느리는 누굽니까?"

남편은 음악이나 듣자며 카 오디오 볼륨을 올렸다.

나는 정말 무시당하고, 마치 내가 온통 속은 것만 같아 분통이 터진다.

내 나이 30세에 이 남자를 처음 만나 연애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직장의 2년선배가 몇 년 전 부터 좋은 남자를 소개하겠다고 해도 시골태생에다 옛날에 세도를 떨치던 양반집 자손으로

맞벌이는 안된다는 까다로운 전제조건이 싫다며 거절하였는데,

무슨인연인지 3년이나 지나 혼기가 다 차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남자나이 32세, 건장한 체구에 굳게 다문 입하며, 외모만큼이나 하는 행동이 반듯하고 당당해 보여서 나는 첫눈에 호감이 갔었고, 만날 때 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하며, 취미까지도 어떻게 알아냈던지 나를 마치 공주마마 모시듯이 하는데야 어찌 싫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날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던, 

가사에만 전념해야 하는 종갓집 며느리감을 찾는 다는 선배의 말이 생각나서 넌지시 어쭈어 보았더니,

이남자의 말이 시골의 부모님이 원하시는 며느리상이므로 참조하여 주시길 바란다며 능청을 떨었다.

나 또한 교직에 대한 사명감과 보람등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하였더니 이남자는 충분히 이해를 한다며,

마치 나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태도가 싫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신혼살림을 차릴 아파트하며,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그 어느 누구 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는데야 어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양가의 인사날자를 정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회사가 연쇄부도를 맞아 결혼이 한 일년 미루어 졌다.

이러니 나도 기가 많이 걲어져 결혼후 한학기를 마져 마치고 학교도 그만두었다.

또 시부모님의 인자함은 물론 시골의 고풍스런 가옥이 참으로 마음에 쏙 들면서 나 역시 쉽게 종가집 둘째 며느리로서 제사일은 의당 맡아야 하는 것 같아 시집온 첫해 기제사와 명절제사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친척들사이에서도 칭송이 자자할 정도로 맡은 일을 잘 해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둘째 며느리가 아닌 종갓집 며느리 대표로서 온갖 궂은 일을 다 맡아 평생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 그저 속았다는 생각 밖에 없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여기에는 친정 부모님께서 사위의 사람됨됨이가 너무 훌륭하다면서 날더러 남편을 잘 섬기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조를 하신 것도 많이 작용 되었던 같다.

나 역시도 결혼식을 연기하게 된 사정을 채권자들로부터 피신을 다니시는 아버지의 딱한 처지를 말하면서 눈물짓는 나에게 이 남자는 따뜻한 마음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처럼 채권자 대표들을 만나고 다니는 등 장차의 처갓집 일에 적극적인 중재로 몇달 뒤 아버지의 공장을 정상가동 시키는데 상당부분 기여하므로서 나를 감동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결혼일자를 다시 잡을 때 쯤해서 이남자는 "미순씨! 우리집장만은 살면서 차츰 구입하고,

우선 전세부터 시작 합시다.

친구에게 빌려준 돈이 영 회수가 안되어서요" 나는 이남자의 행동에 의심이 가면서 무척 실망되었다.

고등학교 교사직에 종사하고 있는 일등 신부 감 이라는 말을 듣던 나였기에 예전 같았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왔겠지만,

이제 여자나이 31세이면 결혼이 늦었다며 집안에서 결혼을 서둘라고 성화여서 나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아무 말 않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 이 남자를 끝까지 믿기로 결심하였다.

아니 사랑하였기에 믿고 싶어 졌다고 표현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우리집에서 아파트를 사주시겠다고 해도 이남자는 친구로부터 빌려준 돈을 돌려 받는데로 본인이 직접사겠다며,

기어코 방두칸의 전세집에서 신혼산림을 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나도 남들처럼, 신혼초에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는 정성스런 밥상과 양복의 색상에 맞춰 와이셔츠와 넥타이, 양말, 손수건 까지 챙겨서 남편을 매일 즐겁게 해 드렸고, 남편도 어여쁜 내가 보고 싶다며 수시로 집에다 전화하고 저녁에는 가능한 나와 저녁을 함께 하려고 친구들을 멀리하면서 까지 일찍 귀가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리고 집에 오면 청소하며 아이들을 봐 주더니 차츰 귀가시각이 늦어지면서 나와의 대화의 시간이 짧아 졌고,

몇번의 명절과 조상제사날에 부엌일과 바쁘게 손님치루는 일을 하는 동안 웬지 내 마음도 변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형편이 비참하게 느껴지면서 그렇게 당당하고 믿음이 갔던 남편에게서 단점이 하나 둘씩 드러나면서 최소한 아내의 의사를 존중한다거나,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하는 불쑥하는 행동들이 마치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더 행복하게 해준다던 이 남자의 말에 속았다는 피해의식이 한번씩 나를 건드리는데,

이번 설 명절일을 5일간 치르면서 무심한 남편의 행동이 또 나를 분노케 하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하여 남편이 말을 걸었지만, 나는 얄미운 남편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작정 하였고,

집에 와서도 곧장 침대속에 누워서 자는 척 하였다.

다음날은 아침상도 차려주지 않고 있다가 남편 출근뒤에 큰아이는 유아원에 데려다 주고는

둘째를 들쳐 업고는 친정을 찾았다.

평소 사위를 끼고 도는 친정 어머니였지만,

그 동안 살면서 고생한 이야기하며 이 남자에게 속았다는 억울한 심정을 친정어머님께 다 털어 놓았다.

나의 신세타령을 듣는 어머니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내말을 다 들으신후,

어머니께서는 큰소리로 나를 나무라셨다.

"어디 박 서방만한 남자가 또 어디 있다고 그렇게 험담이냐?"

"아니, 엄마는 내 말을 다 듣고도 박서방 편을 들 수가 있어?"

"여태껏 함께 살면서 네 남편을 그렇게도 모르겠느냐? "

어머니는 정말 못마땅한 얼굴표정을 지으며, 나를 측은하다는 듯이 쳐다 보면서 말을 이어 갔다.

"사실은 박서방이 네게는 비밀로 묻어 두자고 했는데, 이제는 너도 알아야 할 것 같구나!"

어머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남자는 신부를 위하여, 그리고 피신을 다니시는 장차의 장인을 위하여 채권자와의 중재역활은 물론이었고,

공장 운영자금에 보태 달라며 목돈을 만들어와 나에게 건네었단다.

그동안 직장생활하면서 모아온 주택구입 자금과 사돈의 형편을 아시고 시골집에서 보텐 돈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경우가 아니라고 거절하였으나,

한사코 내미는 박서방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또 채권자들의 서슬에 사정이 워낙 다급하였던 지라 우선 받아 채무의 일부를 갚으면서 채권자들에게 도와 달라고 사정을 하였고, 네 아버지의 평소 신용과 종업원들의 애사정신으로 무사히 부도를 수습할 수 있었단다.

이어서 아파트 구입자금을 만들어 사위에게 진 빚중 일부를 갚겠다고 해도 장인의 사업이 좀더 안정되고,

또 별 어려움을 겪지않고 살아 세상 물정 모르는 너도 남의집 전세의 불편함을 충분히 알때쯤 집장만을 하겠다는

마음씀씀이에 네 아버지는 더 크게 감명을 받았단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남편과 시집, 친정부모님을 비롯하여 모두에게서 나는 따 돌렸던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나니 맺혔던 피해의식도 다소 풀리면서,

오늘 남편에게 아침상을 차려주지 않은 속 좁은 자신이 부끄러워 지면서 아무튼 이제부터라도 남편과 시집을

더 잘 섬겨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결혼식 때 주례선생님께서 부부금슬이 좋고, 부모님을 잘 모셔서 가정이 화목하여야 자식교육을 올바르게 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즉 자식을 낳아 두 돌을 넘기면 남편을 최우선으로 하고, 다음은 부모님을 잘 모시고, 그 다음으로 자식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자식이 나중에 효자가 될 것이며, 독립심이 강하여 사회적응도 보다 잘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오늘 이 숨겨둔 이 이야기속에 남편이라는 사람이 머리로 하는 이해타산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난 참다운 배려와 애정이 나를

감동시키면서 종갓집 며느리의 본분에 더 충실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남편에게 무언가 선물이래도 해드리고 싶어졌다.

추운 겨울날씨에 별로 따뜻하지도, 모양도 나지 않는 낡은 외투를 양복 위에 입고 다니시는 남편에게 제대로 된 외투를 사 드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백화점을 향하였고,

요즘 유행하는 토끼털안감의 프라다천에 천연가죽으로 마감한 최고급 반코트 한벌을 사려다 시아버님생각에 두벌이나 샀다.

마침 설 지난뒤라 떨이 세일가격이어서 부담은 덜 되었지만 그래도 고액을 지불하였다.

이어서 평소에 남편이 좋아하시는 생태 국을 끓여 드리기 위하여 시장을 기웃거리는 나 자신을 보며 이것이 참다운 행복인가 하고 나에게 되 물면서 큰아이가 있는 유아원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