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공황은 일반균형을 굳게 믿었던 경제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시적인 균형이탈 혹은 일반균형에 이르는 과정의 마찰적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경기후퇴가 너무 심각했다. 실업률이 한 때 37.5%를 기록했을 정도였고 경기침체 기간은 10년이나 지속되었다.

대공황이 발발하기 전에는 국가경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최소한 경제학계에서는 그랬었다. 경제는 항상 일반균형 혹은 완전균형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고, 일시적인 균형이탈은 빠른 시간 안에 균형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대공황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경제전문가 사회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대공황의 발상지였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경제참모들은 우왕좌왕해야 했다. 국가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므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때에 개발된 것이 ‘국민계정’으로서, 미국 상무부 경제연구국의 경제학자였던 쿠즈네츠가 고안해냈다. 이렇게 탄생한 ‘국민계정’은 경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가늠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국민소득을 중심 개념으로 삼아 국민계정을 추계했다. 그러나 국민소득은 경제동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났다. 국민소득보다는 국민총생산이 경제동향을 파악하는 데에는 훨씬 더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942년부터는 국민총생산(GNP)을 추계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는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로서 생산이 소득보다는 훨씬 더 중요했다. 비행기, 기관차, 대포, 자동화기 등을 생산하여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국민소득보다는 국민총생산이 경기 동향을 훨씬 더 정확하게 반영했던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국민총생산은 경제동향을 읽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경제예측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린스펀의 자서전 [격동의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960년대 경제예측은 워싱턴을 사로잡았다. 그 시작은 미네소타 대학교 교수인 월터 헬러(Walter Heller)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감세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부터였다.(중략) 1963년 1월 케네디는 극적으로 100억 달러 감세안을 의회에 상정했다.(중략)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린든 존슨(Lysdon Jonhson)이 곧 이 감세정책안에 서명했다. 다행히도 이 정책은 경제자문위원회가 1965년이면 이루어질 거라고 약속한 호황을 현실화시켰다. 경제성장률은 6% 이상이었으며, 이는 월터 헬러의 계량경제 예측과도 들어맞는 결과였다.”(91쪽~92쪽)

“경제학자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마침내 예측상의 난제가 풀렸다고 생각했으며 자축도 마다하지 않았다. 1965년 1월 경제자문위원회의 연간보고서에는 ‘경제정책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경제정책의 도구가 점점 더 정교해지고 더 효율적으로 되었으며, 전통과 오해, 비현실적인 논쟁으로 인한 각종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다.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이제 더 이상 수동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되며, 미래의 발달을 예측하고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선언했다.”(92쪽)

그러나 이런 경제학의 전성시대는 경제예측들이 경제현실과 자주 어긋남에 따라 1960년대 말부터는 ‘경제학의 위기’라는 말이 경제학계 내부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경제예측 전성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심지어 경기가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을 때에는 오히려 하강했고, 경기부진의 지속을 우려했을 때에는 경기가 다시 상승하기까지 했다. 경제학계가 창출한 ‘계량경제 모형’은 경제예측에 있어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계량경제 모형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었고 경제학자의 지위도 점점 떨어지는 결과를 빚었다.

세계대전 직후 세계의 공장이라는 평을 들었던 미국 경제가 1970년대로 접어든 뒤, 불황 속의 물가상승이라는 신종 경제질병인 스태그플레이션을 앓게 되었다. 1970년대 말 연준위(FRB) 의장이었던 볼커가 통화량을 직접 통제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동원함으로써 1980년대에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치유했지만, 1980년대 내내 미국 경제는 일본과 독일 경제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고, 국내 시장에서나 해외 시장에서나 점차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경제전문가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우선은 경제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야 경기흐름에 알맞은 경제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경기가 상승 중일 때에 경기를 부양하면 자칫 경기 과열을 일으킴으로써 오히려 더 심각한 경제난을 부를 수도 있었다. 따라서 경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일은 어느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1990년대 초에 등장한 것이 국내총생산(GDP)이었다. 국내총생산이 국민총생산보다는 경기 상황을 훨씬 더 정확하게 포착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를 알 필요는 없었다. 아니, 경제학계가 그 이유를 찾아내기 전에 현실이 그 사실을 이미 입증했다.

경기 동향은 국내총생산의 증가율인 성장률에 의해서 읽어낼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전년동기대비 성장률이 경기를 읽어내는 중심 지표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경기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기는 하지만, 경기의 방향을 파악하는 데에는 충분치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새로 개발된 것이 전기대비 성장률이었다. 이것은 경기의 향방을 가늠이라도 해줄 수 있게 해줬다. 결국 1990년대 중반부터는 전기대비 성장률이 경기를 읽어내는 중심 지표의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경제학계는 이번에도 왜 전기대비 성장률이 경기흐름을 훨씬 더 정학하게 반영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낼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초장기 연준위(FRB) 의장을 지냈던 그린스펀이 전기대비 성장률을 바탕으로 경기를 읽어냄으로써, 경기흐름에 부응한 경제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경기가 하강할 때에는 금리를 낮춰서 경기를 부양해줬고, 경기가 지나치게 빠르게 상승할 때에는 금리를 높여서 경기를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덕택에 미국 경제는 과거에 보기 힘들었던 초장기 경제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제학적 원리가 아니라 현실적인 경제정책의 모색이 미국 경제의 초장기 번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도 미국 경제학계는 왜 총소득이 아니라 총생산이 경기흐름을 더 잘 반영하는가,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내총생산이 경기흐름을 더 잘 반영하는가, 전년동기대비 성장률이 아니라 전기대비 성장률이 경기흐름의 향방을 잘 나타내주는가 등에 대한 경제학적 탐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직 실용주의적 접근자세가 위와 같은 경제지표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을 따름이다.

지금이라도 굳이 그 이유를 따지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국민총생산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자기 국민들이 생산하는 것이면 모두 합산하는데, 이것은 국내 경기동향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없었다. 반면에, 국내총생산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국내에서 생산이 이뤄지면 모두 합산하는데, 이것이 국내 경기동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했다. 생산은 전후방연쇄효과를 발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자동차를 생산할 경우에도 국내에서 생산한 부품이나 시설을 우선적으로 조달하며, 이런 경향은 철강산업이나 자동차 운송업 등 다른 여러 산업에 파급되곤 한다. 그밖에 인근 상권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 보통이다.

다음으로, 전년동기대비 성장률은 경기가 호조인가 아니면 부진인가를 비교적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경기가 향후에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것을 알아야 생산자나 소비자는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정부의 경제정책 역시 경기흐름에 부응할 수 있다. 그런데 전기대비 성장률이 그것을 상대적으로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전기대비 성장률은 경기가 하강하는가 아니면 상승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은 경기가 호조이더라도 하강하고 있다면 장차 경기는 부진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으며, 경기가 부진하더라도 상승하고 있다면 장차 경기는 호조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국내 경제학계는 경제이론에 집착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강하다. 생산함수에 입각한 이론모델이 경기 예측은 고사하고 경기 흐름을 읽어내는 데에 있어서도 거의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도 국내 경제학계는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 생산함수에 입각하여 잠재성장률을 추정하는 이론모델이 이론적으로는 멋있게 보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도 국내 경제학계는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 그리고 정책당국 역시 그 이론모델에 입각한 경제전망이나 분석을 신뢰하여 경제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러니 경제정책이 어찌 국가경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사에 나타난 경제현실들은 흔히 경제학의 이론모델들을 부정하곤 한다. 그렇다면 경제학자나 경제정책 당국을 포함한 경제전문가 사회가 경제이론에 집착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아니다. 그럼 경제전문가 사회는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경제현상은 물론이고 경제사에 나타난 경제현상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실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제이론을 배척하라는 말은 아니다. 경제이론은 아직도 진화 중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벽한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싶을 따름이다. 경제학이 지금은 비록 더디게 진화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이론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 이전에라도 우리나라 경제전문가 사회도 미국처럼 실용주의적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