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먹을 것 있으면 좀 주시요"
높은 산에서 있던 빨치산들이 밤에 보급활동으로 민가를 계속 털다가
할머니와 아버지가 사시던 샘보리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고생 많으시구랴. 내일 먹으려고 씻어 놓은 보리쌀이 확독 위에 있으니 가져가고
아랫목에 담아논 밥이 몇 그릇 있으니 가져가 잡수시오."
경험이 많은 할머니께서 흔연스럽게 그들의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한 명은 집 뒤로 돌아가 장독대를 뒤지고, 다른 한 사람은 허청과 부엌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을 때,
한 명이 방문을 열고 방안을 둘러 보았습니다.
"아니 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누워있는 거요? 우리가 왔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이모네 식구들은 샘보리 보다 더 깊은 산중에 살고 있다가 빨치산에게 시달리다 못해
먹을 것도 떨어져 아버지 집으로 피난 와 계셨습니다. 
작은 초가집 한 방에 아버지 식구들과 이모네 식구들이 모두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으니 얼마나 이상했겠습니까?
가장 나이 많은 할머니께서 이모를 가르키시며,  "아, 시집 간 딸이 열병이 걸려서 친정에 와 있는데
식구들이 모두 열병에 걸려서 이렇게 누워 있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오기 전에 미리 쌀 두 가마니를 마루 밑에 파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마루를 원래대로 해 놓을 만큼 주도면밀하신 분이었습니다.
옷도 그들 눈에 띄면 바로 가져가기 때문에 초가지붕 위의 용마름 속에 숨기셨습니다.
빨치산이 의심을 하지 않도록 아버지는 열병에 걸린 것 처럼 연거푸 기침을 하고 계셨는데
그렇게 해야 이 집 저 집에서 가져 온 먹을 것들을 지게에 지고 그 먼 산까지 나르는 일을 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짐을 나른 후 산에서 내려오다가 군경에게 들키면 영낙없이 빨치산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여..열병? 이 집 사람들 죄다 열병에 걸렸구만, 이봐 빨리 이 집을 나가야 돼."
"아니 필요한 것 있으면 더 가지고 가시지 않구?"
할머니께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그들의 등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거면 충분해요. 고맙수다."
몇 일 후 집 담 아래 마당에 놋쇠 밥그릇들이 보자기에 싸인 채 떨어져 있었습니다.
빨치산들이 샘보리를 지나면서 그 날 저녁 가져갔던 밥그릇들을 돌려 주고 간 것입니다.



샘보리에서 멀리 떨어진 갓점에 사는 어떤 사람은 빨치산에게 밉게 보였는지 등에 피가 낭자한 채 죽임을 당하였고,
아버지와 한 동네에 살던 경찰 가족이었던 한 사람은 한 밤중에 빨치산에게 끌려갔습니다.
속옷차림으로 끌려나가는 남편을 붙잡고 '데려가려면 나도 데려가라'고 아내가  소리치자 빨치산이 말했습니다.
"원하면 얼마든지 데려가 주지"
그 날 밤 부모를 빨치산에게 빼앗긴 갓난아기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울음과 통곡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몇 일 후 두 사람의 시체가 승부재 대추나뭇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입과 목구멍이 솜으로 틀어 막혀 있었습니다.
가엾은 갓난아기는 할머니가 떠넣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고 보채다가 부모가 죽은지 오래 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