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로 본 한·미 FTA 이어령이 묻고 답하다 코스모스펀드 04-07 08:10
[중앙일보 2007-04-06 06:49:41] [중앙일보 이어령] Q:한.미 FTA가 타결된 뒤 분분한 해석과 엇갈린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일반 국민은 이 문제를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접근해 가야 할 것인가. A: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사용하게 된다. 지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보면 아무리 깨끗한 음식물이라도 세균투성이로 보여 먹을 수가 없다. 그것처럼 어떤 조약도 미시적인 사고로 세부사항을 하나하나 따져 들어가면 긍정적인 해답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망원경처럼 거시적 안목으로 보면 우물에서 나와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고, 과거나 목전의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한국의 풍경이 보일 것이다. 미시적인 것보다는 거시적 담론으로 접근해 가는 쪽이 효과적일 것이다. Q:이번 협정이 한.미 두 나라 어느 쪽에 더 유리하게 됐다고 생각하는가. A:한.미 FTA는 두 나라의 통상 무역에 날개를 달아주자는 것인데, 그 날개의 외형적 크기만 가지고는 득실을 따지기 힘들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뒝벌은 뚱뚱한 몸집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 도저히 날 수 없도록 돼 있는데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꿀을 따온다. 하지만 닭은 큰 날개를 갖고 있어 충분히 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도 좁은 땅속의 모이만 찾아다니면서 영역다툼을 한다. 문제는 날개의 크기보다 날려고 하는 의지와 욕망이 더 중요한 경쟁의 변수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FTA 타결은 경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Q:거시적이고 내재적인 접근으로 FTA의 상황을 보려면 문화 문명의 시각에서도 분석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 문화나 세계 문명의 문맥 속에서 차지하게 될 의미는 무엇인가. A: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나는 "벽을 넘어서"라는 표제로 전 세계에 개.폐회식의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이념의 벽, 언어의 벽, 인종의 벽, 남녀와 빈부의 벽을 넘자는 것이었다. 당시 남북 분단 상황에서 보면 참으로 철없고 공소한 구호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바로 그 일 년 뒤 정말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는 현실을 맞게 됐다. 인터넷으로 국경 없는 사이버 세계가 출현하고, 소련.동구권 등을 포함하는 거대한 글로벌 시장이 생겨났다. 이번 한.미 FTA는 그러한 벽 넘기의 하나로 보면 된다. 앞으로 일본.중국, 그리고 유럽연합(EU)과의 관계에서도 관세 장벽을 넘는 벽 넘기의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담 없이 사는 문화=문명의 집을 짓고 사는 새 문명'의 시대가 가속화할 것이다. 경제만이 아니라 폐쇄에 대한 개방, 수직에 대한 수평, 그리고 중앙 집중에 대한 지방 분산의 문명으로 세계는 지금 FTA의 상징적 티핑 포인트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Q:구체적으로 정치 분야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A:이번 한.미 FTA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기묘한 정치현상을 체험했다. 여당의 리더들이 단식과 반대 투쟁을 하고, 거꾸로 야당이 대통령과 그 협상 관계자들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전도된 정치양상이 빚어졌다. 21세기의 '새 정치문화' 현상을 예견한 테리니 콜라스 클라크 교수의 연구 내용과 똑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옛날에는 정당과 인물에 따라 국민의 지지도가 결정됐지만 이제는 정당이나 이념에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구체적인 정책 사항별로 국민의 지지세력이 바뀌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번 FTA의 타결과정을 통해 한국에서도 그런 '새 정치문화'가 생겨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Q:무역이 차지하고 있는 문화 문명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의 역사에서 차지하게 될 자리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A:근대화 이전 아시아권에서는 통신과 통상의 개념을 엄격하게 구별했다. 즉 쇄국을 국시로 삼고 있던 에도(江戶)시대 일본의 경우 네덜란드.포르투갈 같은 나라와는 통상을 하고 한국은 유일하게 통신을 하는 나라로 구분했다. 서구 열강의 포함 외교로 개항을 하게 된 아시아의 근대문명은 통상일 뿐 신의로서 화친한다는 통신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국제 무역 협약이 인준되자 서구 언론들은 이제 전쟁은 사라지게 됐다고 보도했지만 바로 그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웃음거리가 됐다. 2차 세계대전 역시 경제 차원에서 보면 관세의 불평등과 그 갈등에서 빚어진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흐름은 네이션(국가)에서 로컬(지역국가), 로컬에서 글로벌의 단계로 국가의 울타리가 없어지면서 자유무역이 확산하게 된다. 그럴수록 통상과 통신의 개념을 합쳐야 하는 무역의 문명 문화적 개념이 새롭게 설정돼야 할 것이다. 통신(신의로 맺어진 관계)이 없는 통상의 세계시장은 결국 내셔널리즘과의 충돌로 실패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은 지금 네이션에서 로컬 단계 없이 직접 글로벌로 뛰어들고 있는 상태다. EU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그리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나 이슬람권 같은 로컬리즘 지역공동체의 기반이 없다. 거대한 중국과 강력한 일본 사이에 그나마 분단국으로 처져 있는 한국의 위치가 살아나지 않을 경우 아시아 지역공동체의 아시아연합(AU)이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아시아권 이외의 나라와 협력해 동북아시아의 네트워크 경제권을 만들어야 하는 가위바위보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의 보자기와 주먹의 이항 대립 사이에 한국이 가위 노릇을 하면 패자(覇者) 없는 '가위 바위 보'의 아시아적 순환 문명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Q:이번 한.미 FTA의 체결이 무한 경쟁사회, 그리고 지식 정보사회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보는가. A:지금 우리가 제일 걱정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서비스업 분야와의 경쟁이다. 우리가 쥐를 잡기 위해 쥐덫과 쥐약만 놓고 있을 때 월트 디즈니는 생쥐를 잡아다 미키 마우스 만화를 만들었다.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쥐가 지식자본화한 것이다. 미국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은 지식자본(IP) 분야에 미래의 자원을 두고 있다. 날이 갈수록 MIT는 디즈니랜드를 닮아가고 디즈니랜드는 MIT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에듀테인먼트 산업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 한 한국은 다시 '은자의 나라'로 머물게 될지 모른다. FTA 이후의 역사는 머리와 가슴에서 나오는 자원의 경쟁사가 될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