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네 살 반이 될 때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습니다.
젖먹을 때가 되면  
먼 밭에 나가 일하시는 어머니를 혼자 찿아가
모시옷에 베인 기분 좋은
어머니 냄새를 맡으며 젖을 먹고
논두렁에서 '삐비'라는 연한 풀을 뽑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 온 것을 기억합니다.

평범한 시골에서  부유하지도 않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초가지붕을 돌아 뒤뜰로 가면 살구 나무가 두 그루 있었습니다.
하나는 참살구나무, 다른 하나는 개살구 나무였습니다.
같은 살구인데도 익는 시기도 늦고 맛도 별로 없는 개살구.
봄이면 살구나무에 꽃이 화사하게 피는데  
꽃은 비슷하였습니다.

따뜻한 봄 볕에 둥그런 초가 지붕 그리고 환한 살구꽃.

봄이 되면 연못에 물이 가득 차듯이
집 앞 논에도 물이 넘실거립니다.
토담 넘어 무논에 자란 물풀사이로 물방게가 헤엄치기 시작하고
개구리 알이 논 양지 바른쪽 물속에 자리를 잡으면,
찐 고구마를 점심으로 먹은 소년은
누나와 함께 논에서 우렁을 잡기 시작합니다.

부드러운 논흙의 기분 좋은 촉감과
오후의 따뜻한 논물 속에서 우렁을 잡던
그 행복하던 어느 오후의 기억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논에서 우렁을 잡느라 걸어다니면
신기하게도 거머리가  춤추듯이 물결에  잘도 따라옵니다.

모내기를 하는 날
못자리에서 모를 찌는 (뽑는) 아저씨의 경이로운 손놀림과
구성진 가락의 창가소리,
번개처럼 한 번에 휙 모타레를 묶는 그 놀라운 솜씨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기억이 납니다.

모타레 묶는 솜씨와
가을 벼베기에서 볏단을 묶기 위해
벼 한 포기를 둘로 나누어
낫자루를 사이에 넣어 만드는 멕기( 벼를 묶기 위한 벼포기로 만드는 끈) 트는 솜씨는
접시 돌리기 묘기보다도 더 오묘한 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모타래가 하늘을 날고
아무렇게나 던진 듯 날아간 모타래는
논 여기 저기 조금만 벗어나도 어색해 질 것 같은
꼭 알맞은 장소에 똑바로 떨어집니다.

재봉틀 바늘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시골 아주머니들과 동네 아저씨들의
모심는 그 놀라운 솜씨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패랭이 꽃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논둑에서
동네 인심 좋은 아저씨들과 함께,
파아란 하늘과 풀 냄새를 버무려 먹는 논두렁 새참을
이제는 눈을 감아야 겨우 만날 수 있습니다.

배가 아플 때는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
아버지 냄새에 스르르 잠이 들고
어머니가 뭉쳐주시는 누룽지 한 덩어리면
어떤 놀이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중간치기(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친구를 따라 산에 올라가 노는 것 )를 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꾸짖는 대신,
아무 말씀도 없이
짚으로 엮어 한 줄씩 장에 내다 팔던 귀한 달걀을
한 바구니  삶아 주셨습니다.

땔감이 귀하던 시절,
5 리 밖의 높은 칠보산 너머로 나무하러 떠나신
아버지와 형님의 커다란 나뭇짐이
해질무렵이면 앞산 모퉁이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당에 내려놓인 지게 뒷편 나뭇짐 아래쪽에는
기름소금 반찬으로 점심을 때운 아버지의 빈 도시락과
진달래 꽃이 한 묶음 꽂혀 있습니다.
진달래꽃을  좋아하는 막내아들을 위해서
산비탈 여기 저기에서 꽃을 꺾으셨을 아버지.

국민학교에서 과제물로
보리를 이삭줍기를 해서 편지 봉투에 하나씩 담아오라고 하였을 때
저는 밭이 아니라 곡간으로 이삭줍기를 떠났습니다
마당에 어른들이 계셨으므로
가마니 사이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을 때,
이미 어두워진 마당에서
어머니의 울먹이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사라졌다고 집안이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앞 들판의 큰 방죽을 구석 구석 뒤지셨습니다.
방죽에서 나오시는 아버지의 몸에는
거머리가 온통 뒤덮고 있었다고 합니다.

큰집 누님이 곡간 가마니 사이에서
웅트리고 있는 저를 발견하였을 때
저는 매를 맞을 줄 알았지만
그 때도 저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지 않았습니다.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이듬해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저는 뒤뜰 살구나무 아래에서 한 없이 울었습니다.



아들이 홍역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들의 몸에 열이 오르고 있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들을 보는 순간 저는 마음속 깊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뒤늦은 회초리를 맞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